구름 한 점 없이 푸르른 맑은 날이다. 파란 하늘과 맑은 호수와 평화롭게 꽥꽥거리는 오리들. 걱정 한 줌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여유롭게 호수 근처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고, 나 또한 그 풍경 속 부품이 되어 한가로이 호수 근처를 산책하고 있었다. 타인의 눈엔 내가 걱정 없이 주말 오후를 즐기는 그런 사람으로 보이겠지. 물기를 머금은 굵은 모래가 운동화에 ...
18살 전까진, 라헬은 그 어느 나라를 가도 제우스 호텔엔 머물지 않았지만 19살 이후부터는 할 수 있다면 제우스 호텔의 제일 좋은 방에 머물렀다. 제우스 호텔이라면 치를 떠는 엄마에 대한 작은 복수기도 했고, 몇 년이 흘렀는데도 자신을 여전히 시스터라 부르며 도와주는 영도에 대한 친근감의 표시기도 했다. 세 달을 내리 독일에 머물게 된 지금도, 라헬은 제...
이정이 옷 방에 들어설 때부터 가을의 감각을 가득 채우던 그 향이 진하게 폐부에 들이찼다. 누군가의 목덜미에 얼굴을 들이미는 건 처음이라 민망함에 두 눈을 질끈 감았지만, 언젠가 맡아 본 꽃향기 같으면서도 부담스럽지 않게 상큼함과 포근함을 머금은 그 향이 싫지 않아 생각보다 오랫동안 이정의 목덜미에 머무르게 되었다. 라벤더 향인가? 보랏빛 꽃이 떠올라 가을...
“이쪽은 크리스. 내 대학 동기야.” 가을은 김이 샌 기분으로 이정의 소개를 들었다. 크리스라는 이정의 동기는 어쩐지 빙글거리는 낯으로 가을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가을, 맞죠?)" 크리스는 이정의 소개를 가로채더니 가을에게 선뜻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였다. 방금 전 가을의 신분을 알아내려 찌푸리던 얼굴이 선한데, 저리 웃으니 딴사람 ...
낯선 거리와 낯선 사람들. 한적하고 여유로운 느낌에 약간은 마음이 풀어진다. 가을은 지금 한 겨울, 스웨덴 거리 한복판에 서 있었다. 20살의 가을은 이정을 기다리는 일이 생각보다 쉽다고 느꼈었다. 정신없이 바빴고, 급격하게 변화한 생활패턴과 주위 사람들과 대학생활,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일들에 방학이 되자 겨우 한숨을 돌린다고 느꼈으며 이정과 메일로 근황...
서걱거리며 종이를 채워나가는 펜의 소리는 익숙했다. 나는 늘 너에게 편지를 썼으니까. 비록 너는 한 글자도 읽지 못해 침대 밑 상자에 켜켜이 쌓여만 간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난 편지를 썼다. 그건 그냥 버릇이었고, 너에 대한 애정을 지키는 내 마지막 수단이었다. 늘 어두운 밤에 살고 있는 너를 보는 건 출구 없는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다. 네가 만든 미로...
비가 내린다. 비 내리는 날 그녀는 우산 대신 솜사탕을 들고 있었다. 꿈인가? 비가 내리는데도 포근한 그 형태를 유지하는 솜사탕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솜사탕을 들고 있는 그녀 또한 비가 내리는 거리 한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젖지 않은 머리카락을 유지하고 있었다. 꿈인가보다. 그렇게 확신한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풀 냄새가 가득한 오...
다정은 자신이 도움을 받는 것에도, 도움을 주는 것에도 익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도움을 받는 것에 익숙한 건 다정이 노련치 못한 사람이라, 어수룩한 사람이라 늘 주변에서 도움의 손길을 나눠주어서 그랬고, 도움을 주는 것에 익숙한 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다정의 성격 때문이었다. 도움을 받는 것에만 익숙한 사람도 있었다. 찾아보기 어...
어쩐지 하루 종일 내리는 비가 불안하다 싶었는데, 때마침 날선 전화벨소리가 울려 퍼진다. 시간을 확인한 우진은, 발신자를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전화를 받았다. 비 오는 날 새벽 4시의 전화는 그 전화밖에 없을 테니까. 우진의 생사를 확인하는 전화. “여보세요?” [...] “다정아?” 수화기 너머에서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안도의 한숨이라는 것을 잘 아는 우...
라이어게임에 참가하게 된 이후로 사람이 많은 곳에 가는 것이 꺼려지게 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연예인이나 공인도 아니고, 굳이 그런 곳을 가지 않을 필요는 또 없어서 가끔 나가게 되면, “남다정씨 맞죠?” “헐 남다정 실물로 보니까 대박 이뻐.” “사진 한번만 찍어주세요~!” 절대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연예인도 아닌데 이동에 불편을 겪게 되는 것이 ...
4)에필로그 이정의 전시회덕에 준표와 준표의 누나 준희, 재경, 지후와 서현, 우빈, 일현과 은재까지 모두 모인 자리에서 그들은 방금 전, 갑작스레 전시회에 나타나 사라진 한 여자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 중이었다. “이정이 스토커 아니야? 저번 전시회 때도 한명 있었잖아.” “그건 일반 전시회였고, 오늘은 초대권 없으면 출입이 안 돼.” “내가 모르는 이정이...
3) 26살, 27살 아파트로 들어가는 입구, 우편함 앞에서 가을은 자신의 집에 온 편지들, 고지서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휴대폰, 잡지, 가스비……. 또 돈 내야 할 때가 왔구나. 그리 유쾌하지 못한 생각들 사이로, 진짜 편지같이 보이는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일반 종이들보단 두툼한 재질의 상아색 종이봉투.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그 외양에 잘못 온 건가 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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