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방학은 빠르게 지나갔다. 평일엔 이정을 보지 못했지만, 주말마다 이정이 가을의 집에 와서 밥을 먹었기에 얼굴은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주말마다 얼굴을 볼 수 있는 것도 방학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2학기가 시작되자, 이정은 눈 코틀새 없이 바빠졌다. 원서를 넣고, 실기 시험을 준비하고, 자소서도 작성하고, 그 와중에 수능 공부도 해야 했다. 개학하고 ...
일요일 오전, 늦잠을 자던 가을은 밥 먹으라는 아빠의 말에 일어났다. 주섬주섬 흐트러진 머리를 올려 묶고 방에서 나오는데, 이정이 식탁에 수저를 놓고 있었다. 이제 그만 앉아서 밥 먹으라는 가을 어머니의 말에 이정이 식탁에 앉았고, 가을도 자연스레 그 옆에 앉았다. 선배 왔네요. 비몽사몽간에 가을이 인사하곤 국을 한술 떴다. 어렴풋이 방금 먹은 국이 된장찌...
가을을 괴롭히던 기말고사도 끝나고, 여름방학이 찾아왔다. 고등학생의 여름방학이란 방학이 아니었지만, 학기 중보단 널널한 스케줄에 가을은 만족했다. 가을과 이정의 고등학교인 신화고등학교에선, 2학년은 오전 보충수업만 듣고 오후 자율학습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3학년 미대 준비생인 이정은 오전 수업이 끝나면 종일 미술실에 갇혀있어 학기 중과 다를 바가 없었다. ...
이정은 가을의 예상보다도 더 자연스럽게 가을의 일상에 합류했다. 가을은 시간이 나면 미술실의 이정을 찾아가 수다를 떨었고, 야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늘 그 벤치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다가 뒷문을 열고 집으로 걸어갔다. 주말엔 가끔 이정이 가을의 집에 와서 같이 밥을 먹고, 가을의 가족과 이야기를 하거나 티비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저녁 급식이 별로인 ...
잔디와 점심을 먹으며, 가을은 잔디를 보았다. 잔디의 남자친구인 구준표 선배도 이정 못지않은, 아니 더 유명하다면 유명한 사람이었다. 이 학교의 재단 이사장 아들. 금수저 중의 금수저. 물론 잔디가 그 배경을 보고 사귀는 건 아니었지만, 주변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은 걸 가을이 제일 잘 알았다. 얘는 그걸 어떻게 견디지? 가을이 슬쩍 말을 꺼냈다. 너 유명한...
다음 날 아침, 학교로 가려는데 가을의 엄마가 가을에게 쇼핑백 하나를 쥐여주셨다. 이거 이정이 갖다줘. 어제 이정이 부모님 준다는 걸 깜빡했네. 이정이? 이정선배? 가을은 학교에서 자신이 먼저 이정을 찾아가는 상상을 했다. 극렬한 거부감이 밀려들었다. 이게 뭔데? 그냥 택배로 보내면 안 돼? 너랑 이정이가 같은 학교인데 굳이 택배를 왜 보내니. 가을의 엄마...
가을 제외 모두가 즐거웠던 식사 자리가 끝나고, 어른들은 2차를 간다며 이정에게 가을을 바래다주라는 말만 남긴 채 떠났다. 가을은 이정과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가자. 이정이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가을은 이정을 뒤따르며 어른들이 농담삼아 했던 그들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이정이 가을을 그렇게 예뻐했다던가, 가을이 늘 이정의 생일 케이크 촛불을 먼저 불어버...
코너를 돌고, 길을 건너고, 하굣길에 가을이 늘 들리는 상점 몇 개를 지나자 같은 학교 학생이 거의 없었다. 그 선배는 기어코 가을의 집까지 걸어가려는 모양이었다. 가을은 이 선배의 이름조차 모르는데 이 선배는 가을의 이름도 알고 집도 알고 있는지 걸음걸이에 막힘이 없었다. 가을은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진짜로 이 낯선 사람과 집에 도착할...
+폴더폰과 슬라이드폰 쓰던 시절 쯔음의 시대배경 저 선배야 저 선배. 여친 맨날 갈아치운다는 3학년. 공부도 잘하고 집도 잘살고 잘생겼는데 여자친구가 그렇게 자주 바뀐대. 근데 헤어진 전여친들이랑 다 사이가 좋다더라. 전여친 중 한 명이 우리 언니 친구의 대학 동기의 고등학교 동창의 사촌인데, 늘 전남친 욕하고 다니던 사람이 저 선배만큼은 누가 욕하려고 하...
"갑자기 무슨 그릇을 보러 가?" 가족과 함께 백화점에 가면 사지도 않을 물건을 구경하는 것은 늘상 있는 일이었고, 가을도 즐기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 가을의 엄마가 보러 가자는 그릇은 정말 반갑지 않았다. 우송 도자기는 전문 직영점만을 운영했고, 판매하는 상품도 고가의 장식용 도자기나 주문 제작 도자기였다. 그런 우송도자기에서 얼마 전 처음으로 신화백화...
공기 중의 습기가 못 견디게 불쾌했다. 24년째 맞는 여름이니 적응할 만도 했지만, 여전히 여름은 괴로웠다. 더운 여름엔 거추장스럽기만 한 긴 머리를 틀어 올려 묶으며, 가을은 악세서리함을 보고 있었다. 잔잔한 꽃무늬가 들어간 롱 원피스를 입었으니 심플한 악세서리를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팔찌 하나가 가을의 시선을 잡았다. 몇 년 전, 말 그대로 '끌려...
[소을] 불면증 저한테 부담 안가지셔도 돼요. 저 다 알아요. 선배가 어떤 마음인지. 그래서 이제부터 선배 안 찾아갈 거예요. 선생님, 아니, 은재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자기는 마음먹은 만큼 다 해서 후회도 미련도 없다고. 고마워요. 저에게 최선을 다 할 기회를 주셔서. 이정은 침대에서 몸을 뒤척였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아침을 맞는 생활이 며칠째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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